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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마취통증의학회 일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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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소개

학회역사

학회창립과정

일본으로부터의 독립(1945년)이후 한국전쟁 발발(1950) 이전까지 마취과는 하나의 科로 독립되지 못하고 외과의사가 직접 procaine을 사용하여 국소마취 또는 척추마취를 시행하던 가 diethyl ether 개방점적식마취가 시행되었으며 chloroform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아직 기관내삽관마취가 도입되지 않아 전신마취기나 아산화질소(N2O) 역시 사용되지 못하였다. 1948년에 정맥마취제인 thiopental(pentothal)이 미국에서 도입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마취교육은 외과학 총론 강의 중 1-2시간의 마취과강의가 포함되는 정도였다.

6.25 한국전쟁을 계기로 발전의 전기를 맞이하였는데 이 시기가 한국의 현대 마취과학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으며 민간 부문과 軍부분으로 나누어 기술 하고자 한다. 민간 부문에서 1950년 부산항의 덴마크 병원선에는 Dr. Ole Secher, 포천의 노르웨이 이동병원에는 Dr. Bjorn Heger가 근무하였다. 1952년 부산상고 교사에서 스웨덴의 적십자병원이 대민 진료를 하였는데 Dr. Ingrid Norden이 마취를 담당하였다. 여기에서 신정순선생이 마취교육을 받아 한국에서 처음으로 마취만 전문으로 담당하는 의사가 탄생하였다. 이후 1954년 수산대학교 자리로 이전 시 Heino Meritz가 교대하여 진료를 계속하다가 철수하였다.

1958년 스칸디나비아 3국이 5년간 운영 후 한국에 인도 예정으로 서울에 국립의료원을 설립 하였다. 마취과 초대 과장은 다시 한국을 찾은 Dr. Ole Secher와 Dr. Bjorn Heger이었다. 그 당시까지 마취과는 외과에 속해 있었는데 처음 진료과로서 독립되었다. 1959년 Ole Secher 과장은 서울 시내 각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마취과 의사들과 학술 집담회를 가졌다. 각 병원에서 겪었던 환자 중심으로 토론 및 자문이 이루어졌으며 여기에 외과 군의관들도 참석하였는바 月例集談會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軍에서는 마취의 중요성을 절감한 당시(1951년) 육군의무감 尹致旺준장 및 육군의무감실 기획과장 군의관 孫宜錫소령은 영국후송중대(British Ambulance Co.)의 인도마취군의관 Palmar대위로 하여금 육군군의관 정운혁대위 등 14명씩 2회에 걸쳐 28명에게 2주간의 단기 교육을 실시하게 하였고, 1952년 육군 장교 도미 견학 교육과정이 시작되자 제1차 장교단에 鄭雲赫대위, 尹周悳소령이 참가하여 미국에서 6개월간의 마취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귀국 후 1회에 3명의 군의관에게 3개월간의 마취교육을 3회 실시하였다. 곧 이어 해군에서도 미해군 병원선 세척 중 U.S.S Repose호의 진료부장 Zimmerman대령의 주선으로 1-3개월간의 견 학과정과 병행하여 1년간의 교육과정으로 金仁顯소령(1953년, California, Oakland Naval Hospital ) 및 吳興根 군의관(1954년, Bethesda, National Naval Medical Center)을 미해군 병원에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육군에서는 金琪述, 白光宇, 郭一龍(1955), 陳相浩, 해 군에서는 李石熙대위(1955년), 金寅徹(1956년) , 趙容俊소령, 全世雄소령 등의 군의관을 派美하였다. 한편 마산의 수도육군병원에 흉부외과 및 춘천의 제121후송병원에 신경외과 센터 를 두어, 산부인과출신의 黃泰植, 朴文遠 군의관등이 각각 배속되어 마취를 담당하고 젊은 군의관들에 대한 마취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劉承憲, 김완식, 成樂應, 趙瀅相, 李相信 등 군의관을 국내(육군)에서 교육함으로써 한국현대마취의 기초를 굳건히 하는데 진력 하였다. 美極東麻醉科學會 總務 V.A.Traina(U.S.Air Force) 및 洪淳昌 선생으로부터 세계마취과학회 창립과 더불어 극동마취과학회 창립에 참여할 것을 권유 받은 데 자극 받아 국내에 서 김완식선생이 주동이 되어 마취에 대하여 선견지명을 가진 鄭求忠, 金晟鎭, 閔珖植, 金明學, 李柱傑, 洪弼勳, 李燦范, 崔性章, 金衡翼, 金東吉, 韓格富 등 여러 선생과 함께 1956년 9월 15일 대한마취학회 창설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1956년 11월10일 오후 2시 서울역 앞 옛 세브란스병원 치과강당에서 閔珖植교수, 洪弼勳교수, 朴潤植교수와 그밖에 외과 중진들, 육군의 鄭雲赫, 김완식, 金琪述, 해군의 金仁顯중령과 오흥근 소령, 李石熙 그리고 민간관계 의사 등 약 30명 정도가 참석한 가운데 드디어 대한마취과학회 창립 총회를 개최하였으며 초대회장에 閔珖植 교수를 선출하고, 부회장에는 마취과의사로서 金仁顯중령, 총무에는 김완식선생이 선출되었다. 김완식선생은 이후 7년간 총무로 수고하였으며, Dr.Traina와 洪淳昌선생을 명예회원으로 임명하였다.

학회창설에 이어 1956년12월 閔珖植교수는 마취과를 대한의사협회의 한 분과학회로 등록 하였고 대한마취과학회는 1957년 대한의사협회의 분과학회로 인정 받게되었다. 학회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기 위해 외과계 원로이신 閔珖植교수가 초대 및 2대 회장을 그리고 3,4대 회장을 劉承憲선생이 맡았으며 학회가 성숙해지고 기틀이 잡히자 그 후부터는 마취과의사가 회장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하여 5대 회장에 정운혁교수가 취임하면서 비로소 마취과 의사에 의한 학회의 구성이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1957년에는 서울대학교 의학자문교수인 미국 미네소타대학의 J.H.Matthews교수가 우리학회의 세계마취과학회 가입수속을 도와주었다. 창립 후 회원들이 군에서 제대하거나 그리고 해외 연수 후에 귀국하여 연세대학교(김완식; 1956, 吳興根; 1957, 朴光遠; 1962 ), 서울적십자병원(鄭雲赫; 1957), 서울대학교(李東植; 1957), 경북대학교(陳相浩), 가톨릭의대(鄭雲赫; 1960), 이화여자대학교(劉承憲), 대구 동산병원(金仁顯), 전남대학교(郭一龍, 河仁鎬; 1961), 국립의료원(辛正順; 1958), 한일병원(郭一龍; 1962), 우석대학교(金寅徹; 1958), 부산 침례병원(陳相浩; 1960), 부산대학교 (辛正順; 1957, 李石熙; 1965), 경북대학교(金仁顯; 1966.), 조선대학교(손익종; 1971)등에 마취과를 신설하고 지식보급, 시설개선 및 환자진료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그 이후에도 그동안 육, 해군 또는 WHO에서 교육받은 마취과의사들이 서울시립중부병원(李相信), 철도병원 (全夏鏞; 1966), 백병원(金錫奎), 경찰병원(田溶周, 徐炳台), 도립충남의료원(崔世鎭), 성심병원(趙瀅相), 성분도병원(裵完洙; 1969), 부산시립병원(李用雨; 1968), 고려병원(金晟烈; 1968), 인천도립병원(金鍾來; 1967), 부산메리놀병원(黃漢鎬; 1968), 전주예수병원(申泰碩) 등에 근무하게 되면서 마취과가 신설되었다. 그 동안 외국인으로서 I.S. Robb(카나 다 마길대, 연세대; 1958), Dr.J.H. Matthews(미네소타대, 서울대; 1956), Dr. Ole Secher (덴마크, NMC; 1958), Dr. B.N.Peterson(덴마크, NMC; 1959), Dr. Ondall(스웨덴, NMC; 1960)선생 등이 마취과발전에 끼친 공로는 지대하였으며 세계적으로 절대 부족한 마취의사 양성을 위해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주관한 덴마크 코펜하겐 마취의사 연수교육에 10명 이상의 한국 마취의사가 매년 한 사람씩 참여함으로써 유럽의 마취를 접할 수 있던 것은 특기 할만하다. 또한 李鍾倫, 秦柄鎬, 申雄浩, 朴柱秉, 閔珖植, 尹德善, 洪弼勳, 金紀典, 宋全武 등 여러 선생의 참여가 학회의 진용을 강화하는 데 공헌하였다. 이와 같이 마취과가 급성장하고 마취과에 흥미를 갖는 의학도들이 많아지고 회원수도 증가함에 전국에 학회지부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어 영남지부학회 (1961년, 초대지부장; 李石熙), 호남지 부학회(1965년, 초대회장; 河仁鎬)가 각각 발족되었다. 그후 영남지부는 1972년 8월 5일 경 북지부(초대 지부장; 김병권교수)와 경남지부(초대지부장; 이석희교수)로 분리되었다. 그 이후의 약사는 아래와 같다.

1956년 11월 10일 대한마취과학회 창립총회 개최
(장소: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 초대회장: 민광식, 부회장: 김인현, 총무: 김완식)
1957년 06월 09일 제1회 대한마취과학회 학술대회 개최 (장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1963년 국민의료법의 규정에 따라 전문의시험 실시, 첫 전문의 배출
1966년 10월 평의원제도 도입
1966년 10월 평의원 제도 도입
1968년 11월 01일 대한마취과학회지 창간호 발간 (발행인 : 오흥근, 편집인 : 곽일용)
1973년 마취과 전공의 연차별 심사 시작
1978년 의료보험실시로 보험이사 신설
1979년 10월 13일 제1회 한.일 합동마취과학 심포지엄 개최
(회장 : 조형상, 이사장 : 하인호 장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주제: Pathophysiology of Shock)
1987년 대한 마취과학술상제도가 도입되어 한양대 전세웅교수가 첫 수상자가 되었다.
김용일(34대회장)교수와 전재규(35대회장)교수가 학술상기금으로각각 1,000만원씩 기탁하였음.
1987년 교과서 마취과학(초판, 여문각) 발간
1988년 마취과 발전세미나의 첫 모임인 마취과학 발전연수회 개최
1989년 전공의 자율평가제 시작 (회장 : 정규섭, 이사장 : 김광우)
1990년 아오마취과학회 후 잔여금과 아보트 기금으로 학술상이 확대되어매년 8명에게 시상되고 있다.
1991년 교과서 마취과학(제2판, 여문각) 발간
1994년 교과서 마취과학(제3판, 여문각) 발간
1994년 국제협력이사 신설
1997년 07월 8-10일 한.중 합동 마취과학 심포지엄 (장소: 베이징 국제컨벤션센터)
1998년 정보이사와 홍보이사 신설
1999년 01월 <대한마취과학회 소식> 창간호 발간
2000년 05월 11일 대한마취과학회 회칙 제3차 개정
2001년 09월 13-15일 제3차 아.오 정맥마취학회 학술대회 개최
(장소: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 조직위원장: 윤석민, 대회장: 전재규)
2001년 10월 4-7일 제6차 아.오 부위마취학회 학술대회 개최
(장소: 서울 롯데호텔 잠실, 조직위원장: 남용택, 대회장: 최 훈, 학회장: 오흥근)
2001년 4월 08일 한.일 중환자의학회 심포지엄 (장소: 서울아산병원 대강당)
2002년 교과서 마취과학(초판, 군자출판사) 발간
2002년 03월 30일 ‘마취과’에서 ‘마취통증의학과’로 전문(표방)
2002년 세부 전공이사 신설
2002년 07월 대한마취과학회 사무실을 대한의사협회 회관에서 용성비즈텔 1007호로이전(이사장: 장성호)
2003년 단행본 마취통증의학(초판, 여문각) 발간
2003년 09월 18-20일 제5차 아시아심폐마취학회 학술대회 개최 (장소: 서울롯데호텔, 조직위원장 겸 학회장: 홍용우)
2004년 06월 10-13일 제13차 서태평양중환자의학회 학술대회 개최
(장소: 서울 롯데호텔 잠실, 조직위원장: 고신옥, 대회장: 박성수, 학회장: 정성수)
2005년 03월 24일 대한마취과학회 회칙 제4차 개정
2005년 04월 11일 대한마취과학회지 논문 on-line 제출 및 심사 시스템 구축
2005년 07월 대한마취과학회 사무실 용성비즈텔 1006호로 매입하여 확장 (이사장: 신양식)
2006년 07월 30일 Anesthesia and Pain Medicine 학회지 발간 (회장: 백운이, 이사장: 신양식, 위원장: 장성호)
2006년 11월 02일 대한마취과학회 50년사
(회장: 백운이, 이사장: 신양식, 대한마취과학회50년사 편찬위원장: 전재규, 실무위원회 위원장: 장성호)
2008년 03월 08일 대한마취과학회 신입전공의 오리엔테이션 개최 (장소: 건국대학교병원 지하3층 대강당)
2009년 03월 27일 대한마취과학회 회칙 제5차 개정
2009년 11월 06일 마취과학ⅠⅡ 재판(엘스비어코리아)
2010년 01월 31일 Korean Journal of Anesthesiology 영문학술지 전환 (58권 1호) (편집위원장: 남순호)
2010년 06월 06일 대한마취과학회 제1차 초음파 심포지엄 개최 (장소: 삼성서울병원 암센터 지하1층 대강당)
2010년 11월 04일 마취통증의학 개정(편찬위원장: 장성호)
2011년 02월 15일 회칙, 위원회 규정 개정 및 형식 일원화
2011년 03월 25일 연구개발위원회 신설
2011년 06월 21일 학술상 개편 및 학술위원회 규정 개정
-젊은 연구자상, 최다 논문 제출상, 최다 SCI(E) 제출상 신설
2011년 10월 13일 대한마취과학회 모바일 홈페이지 신설
2011년 11월 03일 홍보만화 ‘당신이 잠시 잠든 사이’ 제작 배포(2011)
2011년 12월 13일 표준개발소위원회 구성
2012년 04월 14일 강원지회 창설
2012년 06월 19일 연구 학술상 신설
2012년 11월 01일 홍보동영상과 애니메이션 제작완료(2012)
2012년 11월 01일 학회명칭 변경에 따른 학회 로고 변경
2012년 11월 02일 대한마취통증의학회로 명칭 변경
2012년 12월 27일 2013년도 탁상용 달력 제작 및 배포
2013년 02월 09일 홍보 대사 위촉-정한용 님

전문과목표방 및 전문의 배출

학회창립 후에도 전문의제도의 부재와 장래성의 불투명성 그리고 무자격 마취조수 양성 등의 문제로 마취과의사의 배출에 장애가 많아 전문의제도의 조속한 실시가 절실하였다. 그 동안 육. 해군 또는 WHO에서 교육받은 마취과의사들에 불과 하였으며, 새로이 지망하는 의사도 적었다. 1963년 당시 보사부장관 鄭熙燮 및 대한의학협회이사장 孫金聲 두 분 선생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마취과학이 진료과목으로 국민의료법의 규정에 따라 전문의시험에 포함 됨으로써 첫 전문의를 배출하였고, 질적 향상의 계기가 되어 학술활동과 진료가 활발해졌다. 전문의제도가 도입된 후에도, 마취과를 지원하는 수련의가 극히 적어서 1980년대까지 매년 10명 전후 정도였다. 그러나 창립 당시 9명에 불과했던 회원이 1974년에 이르러 총 전문의수가 109명이 되었고, 1990년대에 들어 전문의 배출이 매년 100명 이상으로 증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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